신탁부동산과 전세사기 - 법의 신뢰가 무너지는 지점
페이지 정보

본문
금년 3월 경 로스쿨 8기 제자인 유영규 변호사와 홍기웅 변호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법무법인 與溫을 소개하고 고문직을 제안하는 자리였다. 정년을 한 학기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유영규 변호사는 신탁과 관련하여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나에게는 정년 후에도 신탁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둥지를 얻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與溫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신탁칼럼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그 첫 주제를 "신탁부동산과 전세사기 – 법의 신뢰가 무너지는 지점"으로 정해 보았다.
신탁의 법적 구조와 전세사기의 연결고리
최근 큰 이슈가 되었던 전세사기 사건들 가운데, '신탁부동산'을 매개로 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신탁회사 명의의 안전한 부동산'으로 보이지만, 그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면 신탁제도의 불투명성이 임차인 피해의 새로운 통로로 작동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탁부동산의 등기부상 소유자는 수탁자, 즉 신탁회사이다. 위탁자는 부동산을 신탁회사 명의로 이전하고, 신탁원부에 그 관계가 기록된다.
그러나 일반 거래상대방은 등기부상의 ‘신탁’ 표시가 가지는 법률효과를 충분히 인식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신탁재산이 위탁자 명의로 존재한다고 오인한 제3자가 손해를 입는 사례가 발생한다. 또한 신탁원부를 열람하지 않는 한 위탁자와 수탁자의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신탁등기의 불투명성은 전세사기의 빈틈이 된다.
신탁설정 이후에도 위탁자가 여전히 '집주인' 행세를 하며 세입자에게 임대차계약을 제시하고, 세입자는 신탁부동산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전세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실제로 부동산의 등기 명의자는 신탁회사이므로, 계약상 임대인은 법적으로 무권한자일 뿐이다. 전세보증금 반환청구의 상대방을 찾을 수 없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주택임대차보호법의 보호체계도 신탁재산을 전제로 설계되지 않았다.
임대차의 당사자가 신탁설정 관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의 적용 여부가 불명확하다.
결국 임차인은 신탁부동산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반 부동산보다 훨씬 약한 법적 지위에 놓이게 된다.
신탁부동산의 거래에 관한 주의사항 등기제도의 시행
대법원과 법무부는 신탁부동산의 권리관계를 미처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를 악용한 전세사기 특히, 신탁부동산에 대한 전세계약을 체결하면서 신탁원부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권한 없는 위탁자와 임대차 계약하여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른 대항력을 취득하지 못한 사건들을 계기로, 등기관이 신탁등기를 할 때 직권으로 부동산 거래에 관한 주의사항을 기록할 수 있도록 「부동산등기법」을 개정하여 ‘신탁재산에 속하는 부동산의 거래에 관한 주의사항 등기제도’를 2024. 12. 21.부터 시행하고 있다.
부동산등기규칙 제139조의4(신탁재산에 속하는 부동산의 거래에 관한 주의사항의 등기)
① 신탁재산이 소유권인 경우 등기관은 법 제81조제1항에 따라 신탁재산에 속하는 부동산의 거래에 관한 주의사항을 신탁등기에 부기등기로 기록하여야 한다.
② 제1항에 따른 부기등기에는 "이 부동산에 관하여 임대차 등의 법률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등기사항증명서 뿐만 아니라 등기기록의 일부인 신탁원부를 통하여 신탁의 목적, 수익자, 신탁재산의 관리 및 처분에 관한 신탁 조항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음"이라고 기록하여야 한다.
신탁재산에 속하는 부동산의 거래에 관한 주의사항 등기를 통해 신탁원부 확인이 필요함을 당사자들에게 환기시킴으로써 신탁원부를 확인하지 않고 임대차계약 등을 체결하여 피해를 입는 신탁부동산 임차인 등의 피해가 상당 부분 방지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신탁등기가 마쳐진 부동산을 대상으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경우에는 세입자는 입주할 부동산의 건물등기부의 등기사항전부증명서를 말소사항까지 포함하여 발급하여, 만약 갑구의 소유권에 관한 사항에 수탁자(신탁회사)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있다면 신탁원부를 꼭 발급받아 임대차계약을 맺는 임대인이 수탁자(신탁회사)와 우선수익자의 사전 동의를 받은 적법한 권한을 가진 임대인인지를 꼭 확인해야 한다.
임대차계약을 맺는 임대인이 적법하게 임대차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임대인인지 하나만 확인한다면 세입자는 크게 피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신탁부동산의 거래에 관한 주의사항 등기제도의 시행
신탁은 '신뢰'를 전제로 하는 제도다. 위탁자는 수탁자를 믿고 재산을 맡기고, 제3자는 등기와 공시를 신뢰하여 거래한다.
그러나 현행 신탁제도가 임차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신탁회사가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신탁은 더 이상 신뢰의 제도가 아니다.
신탁부동산 전세사기는 단순히 개별 범죄가 아니라, 제도의 불투명성과 책임 회피 구조가 빚어낸 구조적 문제이다.
이제는 신탁제도의 본래 취지인 ‘재산의 안정적 관리와 신뢰의 확보’를 되살릴 수 있는 법적·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신탁이 사회적 신뢰의 제도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투명성과 책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 다음글워크숍 결과, 여온의 존재이유는? 24.10.15